안양신문

인생은 광야학교 '김영숙 어르신' 1

한만정 기자 | 기사입력 2020/07/23 [21:50]

인생은 광야학교 '김영숙 어르신' 1

한만정 기자 | 입력 : 2020/07/23 [21:50]
인생은 광야학교

어르신 개인의 생애사는 우리 사회 공통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분명 우리 곁에 계셨지만 역사는 기억해주지 않았던 그 분들의 기록을 가족과 사회의 유산으로 남겨드립니다.

 

1. 아버지의 큰 꿈, 더 큰 가족의 고통

‘솥에 삶을 것들’

그랬다. 우리는 솥에 삶을 것들이었다. 줄줄이 다섯인 딸들이 아버지 눈에는 언제나 가시였던지 아버지는 줄곧 우리를 솥에 삶을 것들이라고 하셨다.

어디서 비롯된 아버지의 증오였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 증오에서 어느새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스스로 자존감이 낮아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지만 난 그냥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여자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버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이 나를 성장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아버지 김시호씨의 셋째 딸로 10살 때 6.25를 만났다.

고향은 산 좋고 물 맑은 청양군 목면이다. 3학년 때 6.25 전쟁과 만났으니 그 때의 삶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쟁 난리 통에 어린 시절을 보낸 동년배들의 아픔과 사뭇 다르지 않았다.

남들보다 좀 더 힘들었다면 딸들에 대한 아버지의 끝을 알 수 없는 증오를 매일 견뎌야 하는 고통이었다.

김씨네는 유난히 딸이 많았다. 명절 때 다들 모이면 여기저기 댕기머리 계집애들만 보여 어르신들이 한숨을 푹푹 내쉴 만큼 아들이 귀했다.

아버지는 솥에 삶을 것들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딸들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셨다.

인생은 광야학교

신식양반이라 시골에서 농사짓는 생활로는 만족할 수 없는 분이셨다.

줄줄이 딸들을 향한 아버지의 분노는 어디서 온 것일까?

잘살고 싶었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군림하고 싶으셨다. 딸 다섯이 아닌 아들 다섯을 양옆에 끼고 큰소리 치고 싶으셨다.

그때는 다들 그만큼이 인식의 한계였다. 지독한 가난과 딸이라는 홀대, 불만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난 포기하듯 인생을 흘러가는 대로만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지만 학교에 다니는 건 엄두도 못 냈다.

많은 식구가 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 학교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커서 틈틈이 혼자 글을 쓰는 것으로 어릴 때부터 위안을 삼았다.

그 열망이 나이 들어서도 일기를 쓰게 하는 시작이었다. 간간이 아이들과 떠난 가족 여행지에서도 종이만 보이면 펜을 꺼낸다.

순간의 생각을 메모하는 습관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가 공부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갖춰줘도 공부해주는 게 벼슬인 양 한다.

얼마나 큰 축복인지 어린아이들이 알 리가 없다. 도처에 공부할기회가 있지만 아이들은 귀한 줄 모른다. 굶주리고 갈증이 나봐야 간절하게 된다.

 

친정아버지는 요즘말로 한량 같은 분이었다. 술 좋아하시고 큰 돈 버는 일만 관심이 많으셨다.

어디 우리 아버지뿐이겠는가. 당시를 살았던 우리네 아버지들은 힘든 오늘, 희망이 안 보이는 내일을 탓하며 술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감내해야하는 그 어머니들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배포가 크고 머리가 좋은 분이라, 농사꾼으로 당신이 살아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셨다.

한량소리 들으셨지만 한번 폼 나게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크셨다.

떵떵거리며 살고 싶으셔서 농사를 지어도 벼농사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건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셨다.

약초를 심고 병아리 부화장을 하셨다. 작은 것의 소중함보다는 한 번에 큰돈을 벌어보려는 마음이 훨씬 크신 분이었다.

그 시골에서 지천에 널린 것이 약초뿌리 인데 누가 약초를 사 먹을 것이며, 부화장 유지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그것도 모자라 대파는, 온 밭에 잔뜩 심어놓고 팔로를 개척하느라 종일 진땀을 빼셨다.

자기 밭에서 한 뿌리 두 뿌리 심어서 먹지 누가 시골에서 파를 사먹을까, ‘택사’라는 약 뿌리를 심으셨는데 팔로가 없어서 실패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야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좋으셔서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만 하셨다.

인조 직조공장, 공주 유구와 신풍에 직조공장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욕심이 나서 아예 집에 기계를 갖다 놓고 사업을 하셨다.

더군다나 기술이 필요한 일이라 기술자를 불러다 놓고 일을 했다. 변변치 않은 시설에 기술자까지, 당연히 돈이 될 수 없는 구조였다. 끊임없이 사업을 펼치며 실패를 거듭하셨다.

어머니의 만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며 아버지를 말릴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거듭되는 실패로 살림살이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써 참고 참다 한마디씩 아버지께 건네는 말씀은

“여보 쌀이 없어요.”

아버지는 두말도 안하셨다 바로

“굶으면 되지”

아, 이런. 어머니의 애원 섞인 하소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땔감이 필요하면

“여보 나무가 없어요”

아버지는 또 거침이 없으셨다.

“해다 떼면 되지”

어머니의 하소연에 돌아오는 아버지의 대답은 너무나 무책임했다.

딸들은 다들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이라 우린 불평도 불만도 할 수 없었고 남동생은 어려서 집안 돌아가는 정황을 알 수가 없었다.

지독한 가난이 싫었지만 난 그래도 딸 노릇을 하고 싶었다. 아니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라도 어머니의 짐을 덜어드려야 했다.

인생은 광야학교

고단했던 시절, 방년 16세

1950년대 후반 산은 온통 벌거숭이 산이었다. 땔감으로 다들 벌목을 해가서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야 제법 나무를 해올 수 있었다.

장정 있는 집들이야 가능하지만 우리 집처럼 딸 많은 집은 산에 오르는 것도, 나무를 해서 짊어지고 내려오는 것도 다 고역이었다.

변변한 장갑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냥 맨몸으로 산에 올랐으니 겨울이면 찬바람에 손등이 트고 나뭇가지에 여기저기 긁혀 손이 부르튼 건 예사였다.

게다가 산속은 일찍 어두워져서 알 수 없는 공포와 싸워야 하는 그 길도 너무 무서웠다. 어디선가 갑자기 산짐승이라도 나타나면 그 자리에서 잡아먹힐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목숨 걸고 올라가는 산길이었다. 등에 나무를 짊어지고 내려오는 길은 왜 이리 멀고 험한지... 내려 와도 내려 와도, 집은 보이지 않고 눈물도 말라버렸다.

등에 얹힌 나무가 주는 무게에,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까지 더해져서 내 등짐은 허리를 펼 수 없게 만들었다.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 그 때쯤 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다니던 산길이었다. 악착같이 잘 살고 싶다는 오기는 그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갈증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배우고 싶고 잘살고 싶고 배불리 먹고 싶었다. 아무것도 충족되지 못해 애가 탔지만 푸념만 하고 있지 않았다.

난 어쨌든 내 주어진 일에 온 힘을 다했다. 작은 몸으로 산에 올라 나무도 낑낑거리며 제법 해 날랐다. 그땐 그래봤자 열 살이 조금 넘었으니 일찌감치 철이 들고 말았다.

어린마음에 참 속상했던 것은 할아버지는 산을 갖고 계셨는데 그 산에서 우리는 나무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큰 아버지만 아들 대접을 받고 다른 자식들은 홀대를 받았던지 우리는 그 산에서 나무라도 할라치면 눈치를 봐야했다.

밤 한 톨도 건드리지 못했다.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지만 맞대응할 힘도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지만 남자 중심의 사고방식, 거기에 큰 아들에 대한 무턱 댄 기대, 모든 여건들이 여자들의 고단한 삶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열악한 시대였다.

지금 여자들은 그렇게 살라고 하면 다들 아우성에 ‘나 죽겠소’ 할 것이다. 여자들이 좋은 세상 만난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다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생한 우리 어머니 세대와 우리 세대가 남긴 유산이다. 그렇게 유년을 보내며 나는 다시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방앗간을 시작하셨다. 그 날도 내 몸통만한 발통기를 들고 읍내 나가는 시골버스에 올랐다.

<다음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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