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신문

'이재석 어르신' 뿌리 깊은 나무,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1회 차)

김민규 기자 | 기사입력 2021/02/16 [10:39]

'이재석 어르신' 뿌리 깊은 나무,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1회 차)

김민규 기자 | 입력 : 2021/02/16 [10:39]
이재석 어르신 (1933년)
기억의 처음, 나뭇짐 지던 다섯 살배기
 
매일 고단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억에서도 사라진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며 어느덧 여든의 아홉 고개를 넘고 있다.

5남매, 누님이 계셨지만 아들로는 장남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코흘리개 시절부터 감당해야했던 그 때,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격랑의 세월을 견뎌왔다.

아버지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선비처럼 보였지만 어머니는 고단한 삶을 사시는 것을 다섯 살배기의 눈으로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지게를 졌던 그 나이가 겨우 다섯 살이었다. 내 몸집보다 더 큰 지게를 짊어진 아무것도 모르던 그 나이, 다섯 살.

내 기억의 처음이지만, 지게에 나무 짐을 지고 산에서 내려오면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아픔을 견뎌야했던 희미한 그림자,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어린 시절이다.

한창 응석부릴 나이에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다. 그렇게 고단하기만 할 줄 알았던 인생이었지만 근면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보답을 노년의 여유를 통해 얻고 있다.
 
너무 어려운 살림이라 제 나이에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하고 싶은걸 다할 수 없어 묵묵히 집안일을 도우며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열 살 무렵 어머니께서 “우리 재석이 학교가야지 이제라도 학교에 가자” 
 
내심 기뻤지만 겉으로 드러내면서 좋아할 수 없었다. 학교에 가는 동안 어머니 혼자 힘들게 농사일을 하실 게 불을 보듯 훤해서 공부에 대한 열망은 컸지만 나조차도 조금은 시큰 둥 한 채로 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땐 두루 다 사정이 어려워서 1학년부터 제 나이에 입학하는 것도 형편이 좋은 집에서나 가능한 여건이었다.
 
생존에 자리를 내어준 향학열.
 
국민학교, 지각 입학. 나는 집안일을 거드느라 두해를 놓치고 3학년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3학년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조금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좋아서 배우는 것은 다 기억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선비 행세하시고 어머니 혼자 농사짓는 집안의 곤궁함은 나를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없게 했다.

양심이라는 그 마음의 짐을 그 어린나이에 알게 됐다. 공부는 다 잘했지만 그중 계산을 특히 잘했다.

학교 다니던 그때가 1943년 해방 전인 왜정 때라 공책이 없어서 직접 숫자를 써서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산수시간에도 받아쓰기처럼 일본 선생이 불러주는 대로 들으면서 계산을 했다.
 
“1 보태기 2"
"2 보태기 3”
 
나는 들으면서 바로 계산을 척척해냈다. 다른 친구들은 듣기가 바빴지만 난 어느새 계산을 다 했다. 열심히 들으며 끄적거리던 친구들의 답은 다 오답이었다. 일본선생도 내 옆댕이(옆자리)앉은 친구들한테 내 답을 보고 베껴 쓰라고 했다. 친구들은 내 답을 옮겨 적느라 바빴다. 내심 뿌듯했지만 내 작은 기쁨도 거기까지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선생한테도 인정받았을 만큼 계산을 잘했다. 그렇게 인정받았지만 어머니 혼자 고생하시는 것을 이미 알아버린 애 늙은이였던 나는 학교를 더 이상 다니지 않고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과 농사를 짓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나에게 묻지 않으셨다. 학교에 가는 날수가 줄어들면서 학교는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마을에서 돈 좀 있는 집 아들이었으면 최씨네 누구 공부잘한다고 소문났을 텐데 집이 가난하니 나의 재능도 소리 없이 묻혔다.

학교 가는 친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뭇짐을 지고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다. 어린 아이였지만 사나이라고 눈물을 훔칠 수는 없었다.

학교 공부보다 배고픈 걸 먼저 해결해야하는 절박한 때, 나에게 공부는 사치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난 일찌감치 애어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래도 부모님에 대한 반항의 마음보다는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는 장남 부채의식이 나를 쓰러지지 않게 했고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게 했다. 생활력은 없으셨지만 양반의 피가 흐르던 아버지가 물려준 가계의 전통 이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33년생인 내가 열세 살 이었을 때 광복이 되고 일본선생들은 모두 떠났다.

태극기를 들고 다니며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의 모습도 일본사람들에게 엄청난 고초를 당한 건 아니었지만 일본선생들이 주던 위압감을 생각하면 해방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애 어른 할 것 없이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이 물러가고 나라가 독립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들 삶이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렵기는 매 한가지였다.

생존과 나라의 운명 앞에서, 공부하고 싶던 욕망은 제 풀에 꺾여 버리고 난 일찌감치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나라가 해방이 되었어도 거센 파도는 여전히 내 앞에서 떡 버티고 있었다. 아, 힘든 시기였다.
 
가난에 내몰린 암울했던 10대, 그러나 절망은 없다.
 
지게 짐, 매일 200리 길, 어머니를 돕겠다고 동네 동갑 친구들 여덟 명과 같이 나무를 하러 다녔다.

지금은 다 고인이 된 친구들이지만 그 녀석들은 멀리는 못가고 동네만 겨우 다녔다. 마을에서는 더 이상 나무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산도 울창하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마을에서 이미 벌목을 다 해버린 뒤라 나무를 하려면 아산 송악까지 가야했다. 난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난 지게꾼들이랑 같이 나무를 하러 다녔다. 그땐 그저 걷고 또 걸어서 다녔다.

100리, 말이 100리지 왕복 200리를 걷는 것이다. 그것도 산보가 아닌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 돌아오는 고단한 왕복 길 이었다.

아산 송악 강당골까지 다녀왔다. 강당골은 광덕산 자락. 광덕산은 700미터가조금 안 되는 산인데 울창한 수풀이 나무하기 좋았고 시원한 계곡물이 자랑인 강당계곡도 있었다.

나무 껍데기를 벗겨오기도 하고 나무를 한 짐 지고 오기도 했다.19왕복 200리 길이니 새벽 4시 칠흑처럼 어두운 그 시간에 출발해서 깜깜한 밤중에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다.

지게꾼들인 어른들과 보폭을 맞추는 것도 어렵고 한창 먹을 나이에 배를 곯아가면서 나무를 해오는 길도 보통 서글픈 게 아니었다. 너무 늦으면 안 되서 지게를 지고 뜀박질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건 나무 짐이 주는 무게가 아닌 내가 짊어진 인생의 무게였다.

그래서 또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갈듯이 고통스럽기도 했다. 나무하러 다닐 때는 밥 때를 다 챙겨먹을 수 없어서 배가 한창 고플 땐 준비해간 고구마를 꺼낸다. 고구마 두개를 마파람에 개 눈 감추듯이 후다닥 먹고 손바닥으로 계곡물을 떠서 마시고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밥은 어디에도 없다. 급히 먹는 바람에 가끔씩 물기 없는 고구마에 목이 메었다. 숨쉬기 곤란한 경우도 허다했다.

내 삶이 목조이듯이 숨통이 막힐 때도 간간이 있었다. 숨 쉬는 그 자체만으로도 헐떡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 고단한 삶을 살았던 배고프던 시절의 단면이다.

어쩌다 누룽게(누룽지)라도 들고 가는 날이면 호사를 누리는 것이다. 알고 보면 그건 고생도 아닌 그 시절을 살았던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말하면 뭐혀” 
 
배고프고 힘들던 그 시절은 군대 신체검사를 받을 때 여실히 드러났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사춘기를 보냈더니 난 체중미달이었다.

뼈밖에 안남은 상태라 몸무게가 50키로가 채 안됐다. 신검 나온 또래들을 보니 못 먹고 살기는 나와 마찬가지였을 텐데 그 친구들은 스무살장정으로 보였다.

나만 배를 곯았던 것처럼 너무 말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체검사장의 여사무원이 있는 곳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달라질 수 없었다. 몸무게가 45~51키로 정도 된 신검 자들에게 주로 ‘체중 미달 제2을종’ 판정을 내려줬다. 군대는 미뤄졌으며 사실 한창 나이의 사나이로서는 그리 명예스럽지 않은 병역판정 이었다.
 
농사를 돕던 청년기 때도 우리 집의 여건은 매한가지였다. 우리 땅이 없어서 말 그대로 집어 내버리는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는 일하는 법을 잘 몰라서 내 버린 땅을 주워서 오셨다. 농사 안 짓고 그냥 두는 땅, 일본사람들이 버리고 간 땅을 주워 오셨다.

그 땅에서 농사짓고 식구들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다. 버려진 땅이라도 결국은 땅 임자가 나타나서 내가 흘린 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어이없는 일들이 많았다. 남의 땅에 농사를 지었으니 내 차지가 안 되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땅 뙈기라도 있으면 일단 농사를 짓고 식구들 먹거리 만이라도 챙기려 했던 마음이었지만 그 심정을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돈 없으면 설움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래전 그때부터도 억울하면 더 배우고 돈 벌라는 얘기가 있었다. 우리 인생에 피할 수 없는 숙제들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

포토
메인사진
안양시사회복지협의회, 건강나눔해피시니어 ‘노인종합복지관’ 연계 건강나눔 해피시니어 ‘건강체조 및 특식제공’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