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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20년07월07일 13시39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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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천에 곱게 핀 목단 꽃 '김용희 어머님'

 

무명천에 곱게 핀 목단 꽃 '김용희 어머님'

흐드러져 봄이 깊었던 4월의 봄날, 남편을 떠나보낸 어르신. 평생 동반자요 동지였던 그니가 떠난 날 부축하는 딸들이 곁을 지켰지만 허전한 마음을 보듬기에는 긴 날들이 필요했다.

녹음이 짙어 세상은 푸르름으로 뒤덮였다. 여든 일곱 해 동안 해마다 봄이 가고 여름 오는 길목에서 녹음을 만났다. 그리고 단풍드는 가을 앞에서 배웅했다.

인생의 겨울을 맞이한 어르신, 매서운 바람이 아닌 장독대에 쌓인 따뜻한 함박눈처럼 햇살에 부서지는 따뜻한 겨울날이기를.

손끝이 곱고 맵던 큰 애기

나는 충남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가 고향이다.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고 동생 둘을 먼저 가슴에 묻고 바람결에 날려 보내며 슬픔을 달래는 법을 배웠다.

인생의 아픔들을 고스란히 지닌 채 살아왔다면 여든 일곱 해를 살아낼 수 없었다. 때론 망각이라는 도구가 위로가 되기도 한다.

나는 동년배보다 키도 컸고 부지런했으며 손끝이 곱고 야무졌다. 베갯잇과 치마 끝에 목단 꽃으로 수를 놓고, 별이 수놓은 길 따라 야학을 다니면서 세상을 조금씩 알아갔다.

내 손 땀으로 베갯잇에 어여쁘게 핀 목단 꽃은 이웃아낙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값을 지불하면서 사는 분들도 있었다.

시집가는 길, 고운 꽃 자수들이 살가운 동무였다.친정집은 부유하고 인정이 많아 6.25때는 대문 밖에서 기웃거리는 피난민들에게 문을 열고 청국장 한 그릇이라도 같이 나눠먹을 수 있게 하셨다.

아버님의 속 깊은 성정은 동네 어귀까지 닿아 있었다.

형부가 집안일로 가을에 시제를 지내러 다니시다가 몇 차례 지켜 본 청년이 참하고 성실하다며 중신을 섰다. 내 인생의 동반자 그니 한 귀전님을 만났다.

남편은 6남매의 장손이었고, 집안도 한 씨 종손집안으로 어렵게 살지는 않았지만 머리들이 좋아서 공부를 가르치느라 항상 절약하고 사셨다. 남편은 공민학교 4학년까지 다니셨고 동생들 가르친다고 집안 농사일을 하고 열여덟 살 무렵부터는 야학선생님을 하던 중 나와 결혼을 했다.

남편은 성실하고 온순한 미남이었다. 한번은 야학에서 책 걸이 한다고 학생들이 음식과 막걸리를 준비해 와서 못 먹는 술을 주는 대로 마시다가 집으로 업혀왔다. 집안이 발칵 뒤집혀 난리가 났었다.

나도 새댁 때라 허둥지둥 뒷수습하느라 물 떠다 드리고 속 가라앉게 하는 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입에 넣어 속을 달래게 했다. 술 못하는 양반 덕에 혼쭐이 났던 날이다. 술주정을 몰랐던 점잖은 양반이었다.

무명천에 곱게 핀 목단 꽃 '김용희 어머님'
무명천에 곱게 핀 목단 꽃 '김용희 어머님'

나를 키운 건 8할이 한숨 그리고 인내

시동생들 중 고등학교 때 시집와서 모두 대학까지 마쳐주고 정작 내 딸들은 고졸 졸업장으로 대신하게 했던 아픔은 가슴 한편에 묻었는데 문득문득 차올라 올 때는 울화도 같이 치민다.

열아홉 새댁으로 고단했지만 든든한 남편 덕에 힘든 마음자리에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시어머니께서 심통 부리는 날이면 시동생들도 말리기 힘들었고 나는 말없이 호미 들고 뒷밭에 나가 애꿎은 고랑만 파고 또 파면서 속울음을 삼켰다.

내 밥상은 부뚜막에 차려졌는데 한 술 겨우 뜨자마자 시어머니 심통에 밥상이 꽃밭으로 날아가면 주워 담느라 눈물 콧물이 뒤섞여 한숨만으로는 위로가 안 되었다.

왜 그리도 모질었을까?

당신에게도 한이 있었을 터인데. 그 속내를 다 풀어드리지 못하고 보내드려 안타까움만 남았다.

집안일 억척스럽게 50여년, 훈장이 된 굽은 허리, 손가락 마디마디의 통증들이 살아온 날들을 반증하지만 지난 세월이 야속하지 않다.

나보다 더 힘들었던 남편, 하늘나라 가는 길 먼저 배웅하며 그 양반이 혼자 남게 하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다.

4년 전부터 군포 아들집에서 거하며 내 피붙이들과 살가운 시간들도 보내고 있다.

노년의 큰 기쁨이 없어도 섭섭하지 않은 건 지난 여든 일곱의 내 삶이 부끄럽지 않고 자존심을 지켰기 때문이다.

얼기설기 실타래들이 수십 년, 그 많은 세월동안 자수천 위로 피어올랐다.

피륙위에 곱게 앉은 목단 꽃이 내 인생과 많이도 닮았다.

목단 꽃 향보다 더 진한 인향(人香)으로 남았다.

아직 정신 있을 때 나와 동행한 우리 피붙이 살붙이들 이름 하나씩 불러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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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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