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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20년08월20일 17시07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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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안양시민도 모르는 안양의 역사 6
삼막사는 왜 안양8경이 아니고 삼막사 남녀근석이 지정됐을까?

안양 만안구 삼성산에는 삼막사라는 절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677년(문무왕 17) 원효元曉·의상義湘·윤필潤筆 3대사大師가 관악산에 들어와서 막幕을 치고 수도하다가, 그 뒤 그 곳에 절을 짓고 삼막사라 했다는 전승이 있는 절이다.

삼막사 전경(출처 - 경기관광포털)

원효ㆍ의상ㆍ윤필이라면 우리나라의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불교의 역사에도 큰 획을 그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3명의 명승이 한자리에서 수련했다는 절이 국보급으로 보존되지 않은 점이 믿기지 않았고, 게다가 이렇게 유래가 깊은 절임에도 안양8경에는 삼막사가 꼽힌 것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남녀근석이 꼽혔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지금의 삼막사는 그 세 명승이 수련하던 곳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절은 여러 번의 중수重數와 중건重建을 거쳤다. 중수란 낡고 헌 건축물을 수리하는 것을 뜻하고 중건이란 건축물을 고쳐 세우는 것을 의미는데, 그 배경이 예사롭지 않다.

삼막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사지寺誌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신라 말부터 고려 건국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지는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개칭했고, 고려의 태조가 중수하여 삼막사라 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까지는 창건 당시의 모습을 대체로 유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348년(충숙왕 4) 나옹懶翁이 이 절에 머무르면서 수도했고, 1394년(태조 3)에는 왕사 무학無學이 이 절에서 국운國運의 융성을 기원했는데, 조선 건국부터 무학과 인연이 깊었던 태조 이성계는 1398년에 삼막사를 중건한다.

이때는 삼막사의 초기 모습이 많이 훼손됐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새로운 건축물도 생겼다.

억불숭유抑佛崇儒를 기본 정책으로 삼고 세워진 조선이지만 태조 때까지는 불교 세력을 일방적으로 억압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삼막사를 중건할 수 있었다. 또한 태조의 중건 명령이 명분이 되어 그 뒤 몇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친다.

명부전의 현재모습(출처 - 문화재청)

그러다 1880년(고종 17)에 의민義旻이 명부전冥府殿을 짓고 이듬해 칠성각七星閣을 지은 것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모습이 됐다. 

이 절을 지칭하여 조선시대부터 남왈삼막南曰三幕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남쪽에 있는 성인의 말씀 같은 곳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의 삼막사는 남서울의 수찰首刹이자 서울 주변의 4대 명찰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원래 ‘막’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절은 화려한 기와나 번듯한 대웅전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특히 3대사가 수련을 하는 동안에는 말 그대로 막사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원효대사가 이곳에 절을 지을 때는 대형 사찰은 산에 짓지 않는 시기였다.

신라는 불교를 숭앙했고,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불교의 위상이 가장 컸던 시기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깊은 산중에 대형 사찰을 마련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망해루望海樓·대방大房·요사·칠성각 등이 있는데, 대웅전은 조선 초기 무학 대사가, 망해루와 명부전 등은 현대에 와서 개축됐다.

사실상 모든 건물이 조선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이 절이 엄청난 전승과 의의에도 불구하고 국보급이 될 수 없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 마애삼존불, 사적비 전경(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막사 내에 있는 유형문화재는 마애삼존불, 삼층석탑, 사적비 등이 있는데 모두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건축물 중에는 명부전이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됐다.

그렇다면 안양8경 중 하나로 꼽힌 남녀근석은 어떨까?

물론 문화재에 등급을 두고 그 가치를 그 등급에 따라 나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옳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보존가치에 따라 관리의 정도도 달라지기 때문에 문화재 자체로 봐도 등급은 무시할 수 없는 분류다.

남녀근석은 현재 경기도 민속자료 제 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원효대사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 바위들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현대에서 가질 의의는 현저히 떨어진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삼막사 남녀근석 전경 및 세부 사진(출처 - 안양신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설명대로 ‘인공을 가하지 않은 화강석’을 안양 8경으로 지정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차라리 삼막사 전체를 안양 8경에 포함시키면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어차피 역사적 의의만으로 8경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삼막사 남녀근석을 짚어서 넣은 합리적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다.

필자는 이 역시 고민 없이 하던 대로 진행하는 관행적 행정의 결과라고 본다. 

그게 아니라면 이 바위를 만지면서 자식 두기를 원하고 순조로운 출산과 일가의 번영, 무병 및 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는 전설을 믿는 것일까?

여전히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 등 이른바 깨끗한 날이면 경향 각지로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촛불을 켜고 또 삼색 과일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린다고 하니 문화적 가치가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겠다.

하지만 좀 더 합리적인 태도가 시정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남길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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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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