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신문

[특별기획] 토박이도 모르는 안양의 역사와 문화 1

안양, 그리고 안양 땅의 사람들

이성관 기자 | 기사입력 2020/07/03 [11:36]

[특별기획] 토박이도 모르는 안양의 역사와 문화 1

안양, 그리고 안양 땅의 사람들
이성관 기자 | 입력 : 2020/07/03 [11:36]

우리나라의 지역명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 대도시나 과거 도읍지 이름을 따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특징은 아니고, 한자문화권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각자의 언어는 있었지만 문자가 없었던 시기, 한자를 기준으로 지명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안양’이라는 도시 역시 한자 지명이고, 중국에는 상나라의 옛 도읍지인 안양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곳 안양은 다른 많은 지명과 마찬가지로 중국 도시의 이름을 따라 한 것일까?

과거 안양시 지도(출처 - 안양시청)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안양'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알아 보았다. 과거에는 행정구역상 구분되어 기록된 지명 외에 당시 백성들이 부르는 지명이 따로 있었다.

이런 지명은 특징적인 건물이나 지역 형태, 전설 등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지역 사람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자신이 행정구역상 어디에 살고 있는지 평생 몰라도 다른 지역에서 온 나그네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안양은 줄곧 초행길의 나그네에게 설명하기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역민들이 흔히 쓰는 지역명과 널리 알려진 지명이 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 안양지역은 백제의 영토로 있을 때부터 행정구역으로는 과천을 중심으로 한 ‘율목군’에 속해 있었다.

안양지역이 행정구역상으로 과천과 구분된 것은 1941년 즉,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서이며, 지금과 같은 면적을 가지게 된 것은 1963년에 박달리와 신안양리가 합류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문헌을 살펴보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말이 ‘안양’이었던 기록이 많은데, 통일신라 때 지었다고 알려진 안양사安養寺에 대한 기록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안양시 홈페이지에는 흔히 후삼국시대라고 알려진 통일신라 말기(AD 900, 효공왕 4년)에 왕건이 과천 일대를 정복하러 왔다가 신령한 기운을 느낀 후 그곳에 절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능정’이라는 승려와 협의해 안양사를 창건했다는 설명이 있다.

덧붙여 이 안양사는 조선 초 억불정책으로 인해 폐사되었다는데, 2010년 발굴조사를 통해 안양安養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기와편이 나와 안양사의 존재가 확인해 주었다 설명하고 있다. 

현재 안양사 모습(출처 - 안양시청)

그 외에도 안양이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서 정조 대왕이 사도세자의 능으로 행차하기 위해 만든 만안교에서 ‘안’을 따고 뒤에 효의 뜻을 담아 봉양한다는 의미의 ‘양’을 붙여 안양이라도 했다는 기록 역시 소개하고 있는데, 안양사의 존재 때문에 안양이라는 말이 이 지역에 붙었다는 이야기와 상충되는 면이 있다.

둘 중에 어떤 것이 안양의 유래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안양사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원래 안양은 불교 용어 중 안양정토安養淨土 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그 뜻은 ‘마음을 편하게 지니고 몸을 쉬게 하는 것’이며, 이를 기본으로 하는 안양사는 불교문화권 곳곳에 있다.

우리나라에도 같은 이름의 사찰이 여럿 있었는데, 전승내용이 안양지역의 안양사와 유사한 경우가 있어 역사 속에 존재하는 안양사가 지금 안양지역의 안양사인지는 모호하다.

실례로 강원도 철원에는 안양시의 안양사와 마찬가지로 왕건이 세웠다고 하는 안양사터가 발견되었으며, 칠층탑이 있다는 사실도 동일했다.

하지만 2010년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여러 기록 속의 안양사는 안양지역에 있는 안양사 라는 두 가지 증거가 확인됐다.

하나는 앞서 말한 안양이라는 명문이 적힌 기와인데, 이것만으로 안양사를 확정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그 이유는 새로 절을 짓는 경우 기존 사찰에서 신축 사찰에 기와를 공양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공양하는 기와에 기존 사찰의 명문을 새기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찰에 가면 기와에 이름을 적어서 보관했다가 나중에 사찰을 새로 짓거나 증?개축할 때 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증거는 안양의 안양사가 기록에 남은 안양사라는 확실한 근거가 되었다. 그 근거는 바로 7층탑이다.

기록에는 안양사의 7층탑이 일반 석탑이 아니라 전탑, 즉 벽돌로 만든 칠층탑이었다고 전해졌는데, 당시 조사를 통해 전탑을 쌓았던 벽돌의 실체가 확인된 것이다. 참고로 철원의 안양사는 칠층석탑으로 칠전탑이라는 기록과는 다르다. 

이렇게 알아본 바와 같이 안양의 유래를 안양사에서 찾는 것은 꽤나 신빙성이 있다.

때문에 정조 대왕이 이곳을 안양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된 것은 원래 쓰이던 지명에 자신의 처지를 접목시켜 뜻풀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이곳을 ‘안양’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 역시 지역 주민이 해당 지명을 이미 안양이라 불렀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안양 사람들은 적어도 300년 이상 길게는 1,000년 이상 이곳을 안양이라고 불렀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안양시 전경 (출처 - 안양시청)

이렇게 한 지역의 일컫는 명칭이 1,000년 이상 지속되는 경우는 꽤나 희귀하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역사 내내 벌어진 외세침략이 5년에 한번 꼴로 있었다.

거기에는 한나라의 고조선 정벌, 당나라의 내정간섭, 몽골의 고려 정복, 병자호란 이후 겪은 청 문화 침입, 일제강점기와 같이 나라와 민족의 존망을 다투던 시기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나라에서 1,000년 간 지명을 유지해온 안양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안양이라는 지역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안정감은 명칭과 그 명칭을 유지해온 안양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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