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이 질문의 답은 현재로썬 청동기 시대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안양 전 지역에 대해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안양지역의 발굴조사 기록으로는 청동기 주거지와 고인돌이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안양지역에 위치한 구석기와 신석기에 대한 유적은 확인된 바 없고 필자의 생각으로는 앞으로도 나오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안양의 좁은 면적에 있다. 대한민국의 전체 영토 중 안양이 차지하는 면적은 0.058% 밖에 되지 않고, 경기도의 다른 기초단체에 비해서도 작은 편이다. 따라서 인구밀도가 매우 낮았던 선사시대에 정확히 현재의 행정구역 상 안양지역을 터전으로 삼은 인류가 있을 확률은 매우 적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80년대 평촌신도시 개발 전에 실시한 조사에서 구석기로 보이는 석기가 확인되었다는 보고가 있어 관련 유적이 존재할 확률도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지표에 돌아다니는 구석기가 과연 안양지역에서 생산됐을까 하는 의문은 지울 수 없고, 80년대에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를 그냥 믿기도 어렵다. 반면 농경이 본격화된 청동기 시대에는 인구밀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한반도 지도 내에 청동기 유적이 없는 지역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따라서 청동기 유적이 안양지역에 분포하는 것은 놀라울 만한 일은 아니다. 다만 조금 특이한 점을 꼽자면 고인돌의 형태와 분포이다. 고인돌은 흔히 ‘족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연구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족장도 아닐 수 있고, 모든 고인돌이 무덤은 아닐 것이라 쪽의 이야기도 힘을 얻고 있다. 한강 이남의 지역, 특히 현재 전라도의 평야지대에서는 고인돌이 집단적으로 확인되는데, 전 세계에 분포한 고인돌의 50%가량이 이곳에 있다. 따라서 당시 인구수로 예상되는 부족의 수를 감안해보면 모든 고인돌을 다 채울 정도의 족장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그 외에도 족장의 무덤이 아니라는 증거가 다수 있어 학계에서는 고인돌을 설명할 때 ‘족장’이라는 단어가 빠진지 오래다. 안양에서는 역시 1980년대 평촌 신도시 개발을 계기로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고인돌 13기가 확인됐다. 이들은 모두 지하에 무덤방을 설치하고 그 위에 작은 돌을 고인 후 덮개돌을 올린 형태를 띠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인돌의 형태는 일명 ‘ㅠ’자형, 혹은 탁자형 고인돌이다. 학계에서는 북방식 고인돌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한반도 북부를 포함해 초기 고조선의 옛 영토로 알려진 요동과 만주 지역 일대에 널리 퍼져 있다. 반면 한강 이남의 고인돌은 대체로 받침돌을 네 개로 구성한 ‘바둑판형’이나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작은 돌로 기반을 만들어 고인 기반식, 굄돌이 아예 드러나지 않고 덮개돌만 드러나는 ‘개석식’이 있다. 이들을 모두 남방식 고인돌이라 하는데 우리가 실물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고인돌은 이 형태를 띠고 있다. 고인돌은 고조선이 만주지역에 위치할 때 북방식이 성행했고, 전국시대 연나라나 진나라 등의 공세에 밀려 한반도 북부로 이동하면서 형태와 규모가 조금씩 변화했으며, 연나라 사람 위만에 의해 왕의 자리를 빼앗긴 준왕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토속문화와 고조선의 문화가 합쳐진 형태로 달라진다. 고조선 세력과 토속세력이 어떻게 융합되었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 고인돌의 형태라 할 수 있는데, 원래 토속문화처럼 땅을 파서 매장을 하되, 봉분 대신 그 위에 돌을 올려서 고조선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표시를 남긴 것이다. 고인돌의 형태 변화는 단순히 시간이 지나서 간단해진 것이 아니다. 둘 이상의 세력이 만나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흡수의 형태로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라 조화로운 통합을 했다는 증거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안양시는 평촌신도시 개발과정에서 발견된 고인돌 13기 중 보존 상태가 양호한 5기를 평촌동 자유공원에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여 보존해 옮겨 놓았다. 이 곳 앞에 있는 현판에는 당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하부구조의 형태와 내부에서 화살촉과 무늬 없는 토기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인돌을 제외하고 발견된 청동기 유적에서는 주거지가 확인되었는데 주거지 안에서 청동기 토기와 각종 생활도구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인 생활상으로 알 수 있다. 토기 윗부분에 구멍이 나있는 토기와 청동기 대표 토기인 무늬 없는 토기 등 발견되었고, 생활도구로는 정착 생활을 의미하는 반달돌칼과 갈돌, 가락바퀴, 돌창, 돌화살촉 등이 확인됐다. 청동기의 안양지역에는 농경과 사냥을 하며, 낮은 언덕에서 너비 약 7m, 세로 약 4m의 면적을 가진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고인돌을 조성하면서 살고 있었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들은 아마도 고인돌에 큰 의미를 두었을 것이고, 인생에 한 번 이상은 모두 모여 고인돌을 조성하는데 동원 되었을 것이다. 그 다음 시대는 초기철기시대이지만, 2019년 발간된 안양박물관 도록에 따르면 2017년에 삼국시대 주거지 1기가 발견된 것이 청동기 이후 고대 유적의 전부이다. 이 유적은 평촌지역 귀인마을에서 발견됐으며, 내부에서는 백제 토기와 온돌시설이 확인됐다. 백제시대의 안양은 율목군에 속해 있었으며, 통일이 될 때까지도 그 지명은 이어졌다. 안양은 삼국시대 내내 바람 잘 날이 없을 만큼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각축을 벌이는 지역이었다. 4세기에는 백제, 5세기에는 고구려, 6세기 이후에는 신라가 주인이 된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겪었을 정체성의 혼란이 짐작이 된다. 안양지역의 사람들은 이런 혼란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불교를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양사터 인근, 즉 현재 안양박물관 근처의 바위산에는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새겨진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마애종이 있다. ‘마애’란 ‘갈아서 새긴다’는 뜻으로 마애종이란 종그림을 바위에 새긴 것을 뜻한다. 이 마애종에는 석수동 마애종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안양사나 중초사에 관련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국내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것이어서 특별한 전승이나 유래가 있을 법하지만 불행히도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는 범종과 누각, 그리고 타종하는 승려의 모습까지 새겨져 있어 생동감이 넘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범종의 모습을 신라종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중초사나 안양사는 통일신라시대(남북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한반도에 청동기가 시작된 이래 안양지역에 줄곧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따라서 안양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도 이곳은 불모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곳이었다.
적어도 지난 4,000년간은 확실히 그러했다. <저작권자 ⓒ 안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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