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신문

[특별기획] 안양시민도 모르는 안양의 역사와 문화 3

만안구는 안양의 시작이자 중심이었다

이성관 기자 | 기사입력 2020/07/17 [17:49]

[특별기획] 안양시민도 모르는 안양의 역사와 문화 3

만안구는 안양의 시작이자 중심이었다
이성관 기자 | 입력 : 2020/07/17 [17:49]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현재 안양의 중심지는 호계동 일부와 범계, 평촌, 비산을 포함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번화가이면서 부동산 가격이나 각종 인프라 시설 등을 따져보아도 안양의 중심지로 꼽힐만하다. 반면, 안양동 일대와 석수동, 박달동은 외곽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60년대 만안구와 1970년대 동안구 평촌동(출처 - 안양시청)

필자가 중심지라고 꼽은 지역은 모두 동안구에 속해 있고, 외곽으로 꼽은 지역은 모두 만안구에 속해 있다.

이런 점을 입증하듯 지난 2018년 지방선거 당시에는 이른 바 ‘만안구 살리기’가 화두로 올랐다. 이때 많은 후보들이 만안구를 지칭하면서 ‘소외된’, ‘낙후된’, ‘불균형 발전’ 등의 부정적인 단어를 꺼냈는데, 이런 점은 안양 사람이라면 대부분 만안구가 동안구에 비해 변두리 취급을 받는 상황에 공감대가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만안구의 1999년과 평촌 신도시 1999년의 모습(출처 - 안양시청)

그러나 이를 조금만 회의적으로 생각해보면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안구는 안양과 서울을 곧바로 잇는 곳이고, 교통체증이 상시적인 과천을 통하지 않고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진입로라 할 수 있다.

실례로 조선시대에는 임금행차 시에 자주 거쳐 가는 곳이기도 했고,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장조)의 무덤이 있는 융릉으로 향하는 길에 언제나 안양의 만안구 지역을 지나쳐 갔다.

이때 행차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건설했던 것이 바로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만안교’이다.

만안교의 현재 모습

만안교는 경기유형문화재 제 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만안구 석수동 679번지에 보존되어 있다.

만안교는 우리나라 석조 건축물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다리를 구성하는 석재의 크기를 일률적으로 맞추지 않으면서도 형태의 동일성을 지키며, 전통적인 아치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치형은 내구성을 극대화 하는 형태지만 고도의 기술력이 없이는 구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궁이나 사원, 왕릉 등에서 확인된다.   

만안교 앞에 비석

만안구가 과거에는 안양지역의 중심지였다는 증거는 또 있다.

바로 ‘만안萬安’이라는 이름이다. 만안은 편안함이 가득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만안구청의 홈페이지에는 정조대왕이 1795년에 만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으로 삼성천에 다리를 지으며 만안교라 칭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개인적 소견으로는 장조(사도세자)의 무덤을 향해가는 정조의 마음을 담아 만안으로 칭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만안교의 설립취지도 그러하거니와 정조는 장조(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시로 찾으며, 올 때마다 부모의 품에 온 듯 푸근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구역의 재편이 있던 1989년에 안양시 지명위원회는 이 전례를 따라 해당 지역을 만안구라 했다.

즉 만안교를 품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만안구라 명명한 것이다. 따라서 안양시 두  개의 구, 즉 만안구와 동안구 중 먼저 이름이 지어진 것은 만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안양시청에 전시되어 있는 흑백사진에서는 만안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서 산과 공장지대만 가득해 텅 빈 것 같은 동안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안구가 ‘동안東安’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만안구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며, 이를 토대로 구의 이름이 지어질 때까지만 해도 안양의 중심지는 만안이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아치형 통로의 모습

이밖에도 안양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동의 이름으로 쓰고 있는 안양동이 만안구에 위치한다는 점이나 비교적 오래된 주택들이 만안구에 몰려 있다는 점, 안양지역의 대학교들이 만안구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 등이 과거 만안구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자면 안양사와 중초사 등 고려시대 내내 최고의 사찰 중 하나였던 사찰들이 만안구에 모여 있고, 국내 유일의 마애종이 만안구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독특한 불교문화를 형성할 만큼의 규모와 자생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석수동 마애불 전경

이렇게 누가 무어라해도 안양의 중심지였던 만안구가 동안구에게 패권을 넘겨준 시기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에 대한 답에는 좀 더 복잡한 인간사와 정치적인 선택의 과정이 담겨 있다.

향후 기회가 된다면 그 이유에 대한 칼럼도 준비할 예정이다.

만약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지고 있는 만안구민들이 있다면, 이 칼럼이 자부심을 가질만한 근거가 되길 바란다.

또한 역사는 시소처럼 올라가는 시기가 있으면 내려가는 시기도 있다.

만약 지금 내려가 있다고 느낀다면 이제는 다시 차고 오를 시기라고 여기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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