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또 다른 인내의 시작 3안양시민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 ‘호인, 술 좋아하는 남편’ 시집가는 길, 길도 없어서 냇물을 따라 차를 타고 갔던 기억에 우리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없는 길을 내면서 가는 것이다. 벼랑 끝에 나를 세웠더니 인생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던 것은 인자하신 시어머니의 사랑이었다. 그땐 다들 어렵고 힘들었던지 이 설움 저 설움 술로 달래며 남자들은 그들 삶의 무게를 덜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도 술 좋아하는 남편을 보며 속은 새까맣게 탔지만, 무턱대고 바가지만 긁어대는 미련한 여자는 아니었다. 아내로서 남편을 이해하려 했고 내 헌신 속에서 가정이 단단하게 서기를 기도했다.
말 그대로 술이 원수지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은산으로 나와서 시계포를 했다. 그때만 해도 시계포는 큰돈을 벌지는 못해도 오고가는 손님들이 있어서 밥은 먹고 살았다. 시계포도 목돈 마련하느라 동네 아줌마한테 곗돈 250,000원 타서 책상 하나두고 시계 줄 몇 개 갖다놓고 시계방을 차렸다. 남편의 이름을 따서 ‘승진당’ 이라고. 손바닥만한 구멍가게였지만 우리가족에게는 희망이었다. 개업하는 날 잠도 오지 않았다. 남편은 손재주가 좋아서 어릴 때부터 모형 탱크를 진짜보다 더 멋지게 만들기도 했었다. 유리장에 먼지라도 묻을까봐 걸레질하며 폼 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라 유리장이라도 반짝반짝 하게 닦아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남편은 사람 좋아하고 천성이 착한분이라 남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잘 믿었다. 남의 말을 잘 듣다보니 누군가 사업을 권하면 또 거기에 온통 관심을 쏟기도 했다. 시계포 할 때 남편의 친구들이 택시사업을 권하는 통에 1년을 택시사업하자고 나를 졸랐다. 사실 그 때쯤은 시계포가 제법 잘됐다. 자리를 잡았고 동네에서 이미 입소문이 나서 먹고 살만했다. 남편이 호인이라 남편보고 오는 사람들도 많았고 난 나대로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을 해서 손님들에게도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친구들이 남편에게 택시 사업하면 돈을 번다고 바람을 잔뜩 집어넣었다. 친구들이 손님한테 받은 돈을 남편 보는 앞에서 천원 이천 원 세고 있으면 남편은 택시사업이 돈이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50년 전, 천원 이천 원이 적잖은 돈이었다. 남편은 돈을 보며 마음이 들떴고 시계포에서 받는 잔돈푼이 당연히 하찮아 보였다. 남편은 나에게 “임자, 택시 사업 해 보자구. 어때 돈 좀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 운전도 못하면서 무슨 택시에요. 지금 있는 시계포나 잘하면 되죠. 다른데 눈 돌리지 말고 지금 가게나 잘 합시다. 경험 없이 덤벼들었다가 실패하면 어쩌려고요” 1년 동안 ‘택시택시’ 노래하던 남편을 이길 수 없어 결국은 택시를 사고 말았다. 삼촌과 같이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뭔지 모르니 그저 운전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막상 사업을 시작하니 돈 걱정, 마음고생이 떠날 날이 없었다. 난 불평하지 않았다. 남편도 가족들과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 호기를 부린 것이다. 혼자만의 영달을 위한 단순한 욕심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편을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나갈까를 고민했지, 주저앉아서 불평과 한탄만 하지 않았다. ## 다시, 생활전선으로. ‘하면된다’ 남편은 택시사업하면서 시계포에 시계기술자 한명을 두었다. 그는 시계기술에 도장까지 팔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손수 파는 도장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때가 있었다. 난 어깨너머로 도장도 배우고 운전도 배웠다. 생계의 수단으로 어설프게 시작됐지만 어깨 넘어 배우면서도 반드시 내 기술로 만들었다. 시계기술자는 추석을 쇠러 간다며 나에게 도장 파는 기술을 간단히 알려주었다. 어릴 때부터 눈썰미가 제법이어서 한 달 동안 ‘김자’ ‘이자’ 시늉만 하며 배워나갔다. 새로운 세계는 크던 작던 경이롭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배우자 했더니 한 달 만에 시늉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일단 해보고 판단하지, 먼저 못한다고 주저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 기술자는 추석을 쇠러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이젠 진짜 내 일이 되었다. 승진당에서 도장도 판다고 소문은 낫겠다, 정말 추석 지나고 손님이 왔다. 돈을 받고 도장을 파줘야 한다. 손도 바르르 떨렸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손님은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돋보기를 더 가까이 들여다보며 한자 한자 파고 여백을 없애나갔다. 그 5분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지. 어느새 내 눈에 보이는 손님의 이름, 김. 영. 길. “아 하나님. 제가 도장을 팠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혼자 진땀을 빼며 도장을 판 내 손길이 신기하고 대견했다. 손님은 내가 첫 작품을 만들었는지 알 리가 만무하다. 도장을 받아가며 “좋네요” 라고 한마디 던져준 것이 그 길로 자신감이 되어 난 도장기술자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 첫 작품의 탄생비화다. 그렇게 도장기술 첫 시작을 마치고 난 못하는 것이 없는 여자로 변신하고 있었다. 위기는 기회이며 두려움 속에서 맞이한 도전이었지만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면서 결과를 내고 한 발 더 성장하는 내가 되었다.
## 당당한 여자로 우뚝 서다. ‘1인 5역’ 시계포 할 땐 우리 집에 성한 냄비가 없었다. 시계 줄을 갈아드리고 혹은 도장을 파드린 후에 한참 지나 어디선가 탄 냄새가 코끝을 진동할 때 마법에서 풀린 듯이 부엌으로 달려갔다. 아내로 엄마로 주부로 가게 사장으로 몸뚱이는 하나지만 너무 많은 일을 하면서 간간이 정신 줄을 놓기도 했다. 그 땐 부엌에서 심지에 불을 붙여 사용하는 곤로를 사용했다. 부엌에 들어가 보면 다음 광경은 불을 보듯 뻔하다. 양은 냄비들이라 그 시간 동안 통째로 새까맣게 타버린 건 부지기수다. 좁은 부엌 안은 아수라장이다. 새까맣게 타버린 냄비들이 간혹 생활고에 힘들어 숯처럼 타들어가는 내 마음인양 애처로웠다. 수세미로 박박 닦으면 어느새 윤기 나는 양은 냄비들 잠시나마 깨끗해지는 냄비들을 보면서 고단한 내 마음을 위로하기도 했다. 5남매 키우랴 가게 운영하랴, 손이 열개라도 모자란 그런 시절을 보냈다. 이따금 술 좋아하는 남편이 술 드시고 다치기라도 하면 난 작은 몸을 어디에 둘지 몰라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수많은 세월 속에서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방법. 생활인로서의 자세, 아내로 엄마로 내가 해야 할 덕목을 그대로 지켜나갔다. 처음엔 헌신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내 역할이었다. 이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여든이 넘었지만 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고 주변에 영향력을 주는 여성이 되었다. ## 마르지 않는 쌀독, 행복한 노년, 하나님의 축복 아이들 키울 때까지 쌀독은 늘 바닥 긁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제 우리 쌀독은 마르지 않는다. 아이들이 보내는 용돈, 거기에 나는 내 기술로 돈을 버는 엄연한 사장님이다. 그 어려운 시절을 용케 견뎌낸 그 시간의 아름다운 보상이다. 어설프게 생계로 시작한 도장 기술, 이젠 제법 근사한 소일거리로 한 자리 떡하니 차지했다. 청춘을 나이로 매기는 게 아니라면 난 진짜 청춘이다. 아직 열정이 있고 지금도 매일 아침이 기다려진다.
## 잘 살았노라!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제 걱정이 없다. 손 갈 일이 없다. 젊을 땐 아이들 키우고 가게하고 남편 돌보느라 몸이 열개라도 모자랐다. 작년 겨울, 우리 아이들과 제주도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다들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느라 바쁜 아이들이 오랜만에 다 같이 모였다. 우리 부부는 너무 행복했다. 그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고 끼니걱정하며 아이들을 키웠는데 다들 착하게 잘 살아줘서 고맙다. 먹을 걱정 입을 걱정 누울 자리 걱정 안하는 게 어딘가...난 그 여행 틈에도 오래된 나만의 즐거운 습관에 빠졌다. 생각나는 무언가를 또 기록해야 했다. 방에 들어와 종이라도 보이면 또 적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기분이 어땠는지...박스 상자 날개에도 쓰고 편지봉투라도 여백이 보이면 또 적었다. 쓰면 행복하다. 평생 공부하고 싶다. 배우고 또 배우고 싶다.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얻는다고 결국 고통이 나를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 시계포의 사장님에서 택시사장님 이젠 도장 파는 사장님으로 난 생활을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식들에게도. 은산 성결교회의 권사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사회에서 안정된 자리를 지키는 5남매에게 존경받는 엄마다. 내세울 것 없는 나의 삶을 존경해주는 우리 아이들. 자식에게 인정받는 것 만한 축복도 없다. 그래서 잘살았노라! 라고..감히 말할 수 있다. 한낮의 햇살에 깜박 졸음이 찾아와 데려다 주는 힘들었던 과거도 단꿈이 되었다. 여든이 넘은 나, 이만하면 자존심을 지켰다. 이제 餘恨(여한)이 없다 <저작권자 ⓒ 안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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