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만남이 여의치 못하여 섬에 정배 定配 되어 사는 기분이다.귀양살이를 지혜롭게 풀어나간 선인들 에게서 도움을 찾아보려 한다. 기우는 석양에 물결 번득이는 동작나루, 고을 끝닿는 남쪽은 나의 옛 마을 이련가 이 시는 다산茶山 정약용 丁若鏞이 33세때인 1795년 서학에 가담 하였다는 이유로 동작 나루를 떠나며 쓴것이다. 귀양 제도는 고려때부터 있던 형벌로 죄인을 먼 지방으로 쫓아 보내는것인데 조선시대에 와서 통치능력이 열악한 왕들이 간신들의 말을 듣고 무고한 충신들에게 행한 예가 많아 이조 정치의 오점으로 보는것이 통설이다. 왕 가운데는 세종이나 정조처럼 자격이 충분한 왕은 몇에 불과하고 대부분 병약하거나 나이가 어리거나 처첩 妻妾 에 빠져 있거나 심한 편견을 가졌거나 판단능력 부재로 당파싸움에 놀아나는 무능의 표본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라를 걱정하는 백성들의 상소가 왕실에 쌓이고 이에 대한 기득권자들의 본능적 방어에 아깝게 희생 되어가는 것은 충신들이었다. 이들이 하루 아침에 사약을 받거나 귀양살이를 떠남으로 개인적 억울함은 물론 국가적 손실과 민심의 흉융함을 막을길이 없었다. 이중에서 몹시 아까운 인물이 있으니 정약용이다. 그는 일찍이 총명하고 학구열이 높아 22세에 과거에 합격한 후 바로 관직에 올랐으나 정치의 그릇된 판단으로 네번에 걸쳐 20여년 이상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는 백성들의 실 생활에 유용한 지식과 실용성 있는 이론을 연구한 이조 500년 역사에서 으뜸되는 인물로 평가 된다. 그의 역할이 우리나라 개화에 반영 되었더라면 우리나라가 적국들로 부터 수모를 당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세계화 반열에 섯을것이다. 권력은 잠시 스크린에 비치는 배우의 역할을 넘지못하는 한시적 존재로 백성을 하늘처럼 여겨야 하고 (인내천 人乃天) 혹시 옳고 그름을 판단 할 때는 玉石구별이 분명하여야겠다. 이것이 귀양살이 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아닌가 한다. 우리귀에 익은 푸쉬킨 (1799~1837 러,시인) 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그가 정치적 자유를 주장하는 시를 썻다는 이유로 추방되어 유형지인 흑해에서 만난 가난한 소녀를 위로 하려고 쓴 시 라고 한다. 요즘 새간을 달구는 흐뭇한 이야기는 조선시대 최고의 서화가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의 걸작 국보180호 100억 이상의 세한도歲寒圖가 소장자의 뜨거운 애국심에 의해 국가에 헌납되었다는 소식이다. 이 작품 역시 추사가 1844년 58세때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때 귀양살이를 하는 자신을 잊지 않고 값진 책을 구하여 온 제자 이상적에게 답례로 그려보낸 작품이라고 한다. 우한 폐렴으로 제한된 일상을 보내는 이 시기가 사색의 열매를 붉히고 자유로운 지성들이 이끄는 곳을 걷는 마음을 키울 수 있는 게기가 아닌가 한다. 오늘도 안양 시민들의 행진에 청신호가 켜지기를 기도 합니다. <저작권자 ⓒ 안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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