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신문

고향 길의 예쁜 꽃 ‘길예’ 다시 찾아 온 봄날, 최길예 어르신 (1936~)

한만정 기자 | 기사입력 2020/09/19 [07:23]

고향 길의 예쁜 꽃 ‘길예’ 다시 찾아 온 봄날, 최길예 어르신 (1936~)

한만정 기자 | 입력 : 2020/09/19 [07:23]
고향 길의 예쁜 꽃 ‘길예’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아이처럼 웃으시는 어르신 머리위에 하얀 벚꽃이 내려앉은 지 오래다. 아름다운 봄날에 태어난 어르신, 화사한 봄날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그 세월이 서글프지만은 않다.

어르신의 지난날을 위로하는 아들딸들이 힘없는 어르신을 매일 일으켜 세운다. 어르신 곁을 지키는 셋째 딸 영자의 속정 깊은 손길에 어르신은 봄 햇살과 다시 따사롭게 만나셨다.

 

고생했지만 사랑에 굶주리지 않았던 최씨네 막내, 길예

내 고향 충북 청원군 두만리, 이름처럼 깊은 산골 마을에서 1936년 음력 3월7일에 태어났다.

생일 때마다 꽃 피는 봄날의 햇살을 머리에 이고 다닌 지 벌써 여든 다섯 해다. 유년의 봄날은 산에는 울긋불긋 진달래가 고운 자태를 뽐내며 기지개를 켰다.

다들 바쁜 농사철이지만 동무들과 진달래 잎을 따 먹으며 고향의 봄을 불렀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붙잡고 따라가 보면 가도 가도 끝없는 험한 산골 마을에 닿는다.

일제 강점기과 6,25를 겪어내느라 산골 마을은 끼니를 때마다 채워 먹는 호사를 누릴 수 없었다. 쌀밥에 고기는 명절날 잔치음식처럼 귀했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오빠와 언니가 귀여워 해주는 마음자리 덕분에 넉넉하지 않았지만 막내로 사랑에 굶주리지는 않았다.

 

고향 길의 예쁜 꽃 ‘길예’

담배농사 하는 집에는 딸 시집도 보내지 말라는 말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고사리 손이라도 보태며 집안 농사를 도왔다. 담배농사는 봄에 모종을 옮겨 심고 한 여름 뙤약볕에 어른 키를 훌쩍 넘길 만큼 쑥쑥 자란다.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려도 식구들이 모여 잎을 엮고 말리는 손을 모아야 했다. 바닥에 흙이 묻지 않도록 조심해서 큰 담뱃잎을 따서 가지런하게 놓는다.

잎을 따면 진액이 나오는데 살에 스치기만 해도 쓰리고 아팠다. 가끔씩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운 건 예사였다. 그 독한 담배나무에도 꽃이 핀다.

아마도 힘들게 일하는 우리네 마음을 달래는 꽃 이었나 보다. 담배농사가 이젠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남은 시골 풍경이 되었지만 우리 때는 먹고사는 간절한 살림밑천이었다.

어린나이에도 꾀를 부릴 줄 몰라 미련하게 일을 했다. 워낙 손이 빠르고 부지런해서 밭을 매도 남들 한 고랑 맬 때 두 고랑을 매며 지칠 줄 모르고 손을 놀렸다.

뼛속까지 성실했던 태생이 우리 자녀들에게도 대물림이 되어 다들 성실하게 자존심 잃지 않으며 살아준 자손들이 시골 할미인 나의 자랑이다.

 

스무 살 새색시의 설렘은 꿈처럼 순간이었다.

한창 예쁜 나이 스무 살에 보은 회남면 조곡리에 사는 멋진 청년 박준석과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친정에서 족두리 쓰고 혼례를 치렀다.

가마에 트럭타고 시집이라고 와보니 시댁의 모습은 그야말로 혀를 끌끌 차게 만들었다.

처마 끝이 머리에 닿는 초라한 집, 남편은 야속하게 결혼하고 바로 군대에 들어갔다.

천애고아처럼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시댁에는 손자며느리의 수발을 기다리는 시할머니와 할아버님, 시부모님, 시동생들이 줄줄이 내 차지였다.

시어머니는 병환으로 몸져 누워계셔 병수발부터 시작되었지만 병수발은 시집살이 축에도 못 들었다.

진짜 시집살이는 서슬 퍼런 시할머니의 호통이었다. 대쪽 같은 시할머니 성화에 하루 종일 발을 동동 굴렀다.

친정을 떠나 온 것만으로 마음이 무너지는데 남편까지 없는 시댁 살이는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고추보다 매운 시집살이였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군불 떼며 밥해 먹이고, 낮에는 밭일하고 그 많은 집안일 끝내고 나서 잠시 벽에 기대 눈이라도 붙이려면 시할머니가 일감을 던져주신다.

저녁만 물리고 나면 등잔불을 켜놓고 일을 시작한다. 밤늦도록 시할머니의 불호령에 바느질 한 땀 한 땀 옷을 만들어 이리저리 대 본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 피곤한 몸을 누일 겨를도 없이 시할머니께서는 옷을 쭉쭉 다 찢으시며 노발대발하셨다.

이것도 바느질이냐고,,. 억장이 무너지지만 속상하다고 그 밤에 친정으로 달려갈 수도 없다. 품에 안겨 터놓고 울 수 있는 남편도 없었다.

뒤꼍으로 달려가 친정 쪽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속울음으로 마음을 달랬다.

운명이라고 위로하기엔 나도 너무 어린 새댁이었다. 대가족을 건사하면서 고단한 하루하루였지만 뒤돌아서면 한 뼘씩 쑥쑥 자라는 아이들 보면서 웃었고 힘들어도 악착같이 버텼다.

 

고향 길의 예쁜 꽃 ‘길예’

봄을 잊은 그대 이름은 어머니

집안 대소사 모든 일이 내 몫이었다. 첫째 딸 덕순이가 태어나자 얼마나 예쁘고 귀한지 며칠은 누워있고 싶어도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쉬게 해줄 수 없었다.

게다가 막내 시동생까지 내 젖을 먹여 함께 키웠다. 나이 차이가 많은 시동생이나 시누는 새댁들 몫이었다.

고단한 매일 속에서 6남매를 두고 나는 배우지 못했지만 자식들은 먹이고 가르쳐야했다.

책값이며 차비, 아이들은 숨 쉴 때 마다 돈이 필요했다. 돈 나올 구멍은 없고 집안일 하면서 동네일을 품앗이로 다니기 시작했다.

살아가는 동안 봄이 오는지 꽃이 피는지 모르고 힘들게 허리를 숙이고 일에 파묻혀 살았다. 봄 하늘 쳐다보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먹기 위해 일해야 했고 부양하는 가족들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남들보다 두 배로 일해주니 주위에서는 나를 먼저 찾았다.

그렇게 수고한 대가는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품삯은 물론 과일과 푸성귀는 대가족을 위한 덤이었다. 내 손맛으로, 매운 손끝으로 이웃과 어울렁 더울렁 서로 나누는 삶을 살게 되었다.

 

남편은 내편이 아니라 마을남편이 되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남편은 집안일은 나 몰라라 했다. 마을일에 뛰어들었다.

남편을 마을에 내 주었다. 마을을 위해 헌신한 남편 덕에 집안 살림을 혼자 도맡아 했다.

봄에는 들로 산으로 다니며 나물을 뜯어 장에 내다 팔아 꼬깃한 푼돈이라도 생기면 바로 속주머니에 넣었다. 허투루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장남이 오면 맛난 것 사먹고 책 사라고 잘 챙겨줄 마음에 고단해도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된 아들이 꼬깃한 쌈짓돈에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먹고 싶은 것 많은 것을 알면서도 넉넉하게 척척 주지 못하는 애미 마음을 녀석이 알 턱이 없다.

남편은 늘 바빴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마을 이장은 아무나 하나 감투를 한두 해도 아닌 20년 넘게 쓰다 보니 마을에 일이 생기면 일군들까지 밥을 해서 먹여야 했다.

남편은 밖에서 늘 호인이었다. 나는 그림자처럼 집안일과 밭일을 하며 푸념은 밭고랑에 같이 묻어버렸다. 팔자로 돌리기엔 억울했지만 숨통을 트려면 내려놓는 것도 맞는 처신이었다.

애태우며 살아오는 동안 계절을 잊은 지 오래다. 삶의 무게에 숨이 턱 까지 차오른 날도 있었고 다음날이면 아이들 자라는 거 보며 한 시름 놓기도 했다. 그래도 매일 매일이 숨찬 날들이라 벚꽃이 피고 녹음이 짙어지는 그리고 다시 단풍이 드는 계절이 오가는 길목에 서 본지가 언제였는지.

남편이 마을의 이장으로 감투를 여러 개 쓰고 있어서 날마다 한 잔하고도 큰 소리 치는 것은 예사였다.

그러던 중 1988년에 청천벽력 같은 암 진단을 받았다. 아무래도 속앓이를 많이 하고 고생을 한 탓이리라.

온 가족이 그동안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엄마의 자리를 위협받았다. 남편은 술을 끊고 집안의 가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위도 놀라고 가족도 놀랐지만 가장 놀란 건 나였다. 결혼하고 30년 동안 그렇게 힘들게 하던 양반이 180도 돌변을 했다.

그때부터 소를 키우며 집안일도 거들고 나한테도 애써 잘 하려고 노력을 하니 알콩달콩 살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살만했다.

애들도 가정을 꾸리고 먹고 살만 해지면서 이제 사는 것처럼 사는구나 한숨 돌리던 차에 애통한 날을 맞았다.

남편은 칠순잔치도 못하고 뇌종양으로 병원에 입원한지 6개월 만에 먼저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다. 원망과 측은지심이 맞물려 떠나보내는 마음에 애간장이 다 녹았다.

 

고향 길의 예쁜 꽃 ‘길예’

자식들이 다시 찾아준 봄날

나도 쓰러진지 벌써 3년째다. 생사의 경계를 몇 번을 넘겼지만 오늘을 또 맞이했다.

아프다면 멀리서 한걸음에 달려오는 우리 자식들 덕분이다. 키울 때 배불리 먹이지 못해 속만 끓였던 애미를 자식들이 자기 몸처럼 보살펴 주니 지난 수고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셋째 딸이 24시간 나를 위해 시간을 내 준다. 나는 그렇게 애들을 키우지 못했는데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그저 먹고 살기위해 일만하던 나를 엄마라고 지극정성이다. 내가 웃으면 같이 따라 웃고 내가 아파하면 같이 걱정이다. 그래서 나는 젊은 날의 나처럼 다시 기운을 내야한다.

그것이 내 인생길에 우리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애미의 마음이다.

나의 삶은 비록 고단했고 소박했지만 고향길가에 핀 예쁜 꽃 길예에게 봄이 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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