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이란 창자가 끊어질듯 한 슬픔이나 괴로움을 이르는 말이다. 과연 어느 정도의 그것이면 창자가 끊어질까? 원숭이를 통하여 파악된 사례가 있어 사람에게도 미루어 볼까 한다. 자연 탐사가들이 보트로 아마존 강변을 살피는 중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배에 실었다. 어미가 번개처럼 올라 새끼를 데려 가겠다고 사람들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밖으로 밀쳐내면 다시 오르고 또 밀쳐내면 오르기를 수차 반복하다 갑자기 죽었다. 죽은 원숭이의 창자가 끊어진 것이다. '자식을 빼앗긴 슬픔과 고통의 경우에 창자가 끊어진다‘는 가설 假設을 얻었다. 수년 전부터 천사와 같은 어린 생명들이 어른들의 손에 의해 세상을 떠나는 보도가 잦았다. 피지도 못한 꽃들이 항변 한번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부모들의 손에 의하여 저질러 지니 국민의 창자가 끊어질 일이다. 지난 6월1일 9세 남자 아이가 계모에 의하여 여행용 가방에 갇혀 숨졌다. 검시결과 "산소가 부족하여 뇌의 활동이 정지되었다"는 애처러운 진단이다. 8월14일에는 10세 형제가 점심식사를 하려고 라면을 끓이다 불을 내어 화상으로 의식을 잃어 보는 이들의 창자가 끊어질 지경이다. 돌이켜 보면 2016년도 겨울은 이런 일이 유난히도 많아 추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TV만 켜면 보호 받아야 할 생명들이 이유도 없이 죽어 갔다. 우리의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은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 심지어 자녀 살인 뉴스가 꼬리를 이어갔다. 천륜天倫의 무너지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소풍가고 싶다"가 죽음에 이를 수있는 말인가? 어린것들을 때리고 굶기고 물에 처넣고 감금하고 방치하다가 힘이 떨어져 죽으면 쓰레기 봉투에 담아 심야에 산에 묻고 닭다리를 안주로 뜯으며 소주마신 부모도 있었다. 아동살해는 가정파괴로부터 시작 된다. 불륜가정은 애교(?)이고 이혼가정이 늘고 있다. 이대로 가면 불량부모에 의해 불량 청소년이 뒷골목에 넘쳐날것 같다. 살아 도망친 경우는 다행이다. 빠져 나오지 못한 10세 이하 어린것들은 이 시간에도 어느 화장실에 감금되어 신음하다 죽어가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이다. 외모는 사람 얼굴이나 마음은 짐승과 같은 전과 18범 인면수심 人面獸心에게 붙잡혀 변소에서 성 폭행 당한 초등학교 1학년 여학생의 기사를 접 할 때 단장의 아픔이다. 가족은 피와 정이 비벼져서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그 관계가 파괴 될 때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다. 성 어거스틴은 "형제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 한다면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조선후기 실학자 연암선생은 일찍 별세한 아버지의 얼굴이 보고 싶을 땐 형의 얼굴을 보았으며 형이 없을 땐 江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았다고 한다. 삶 중에 가장 귀한 것은 값 없이 무한대로 제공되는 공기, 물, 빛과 볕 , 여기에 가족의 힘이 아닌가 한다. 가족에게서 하나님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을 찾자. 오늘도 안양시민들의 행진에 청신호가 켜지기를 기도 합니다. <저작권자 ⓒ 안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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