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만난 하루는... 인생의 덤, 송성자 어르신어르신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남편의 마지막 소원은 들어줄 수 없었다. 스무 살 그 시절에 남편과 나는 뜨거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결혼 전에 남편은 나를 보고 첫눈에 아내로 점찍었다. 박력 있고 고집 센 남편이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끈질긴 구애 남자다운 기질에 사랑을 받아들였다. 알콩달콩 재밌게 살던 우리는 남편이 8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먼저 떠나면서 이승에서는 이별하게 되었다. 남편은 암 투병 할 때 나에게 나도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여장부 기질 있어서 시골 동네에서는 송성자 하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나를 알았다. 19살 때 친구 집에 들렀다가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동네 오빠였고 헌병대 나왔다는데 우리가 아는 헌병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키 크고 잘 생긴 사람들이 헌병대 가는 줄 알던 때라 남편은 어느 것도 해당사항이 없었다. 하지만 박력 있는 상 남자였다. 친구가 저녁 먹고 놀다가라는 말에 나는 어머니한테 혼난다며 응수를 했다. 친구 집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남편이 코웃음을 치며 “서울 가봐라 요즘 여자들 술도 먹고 남자랑 손도 붙잡고 다녀” 어머나 남녀가 대낮에 손을 잡고 다닌다니 역시 서울은 정말 딴 세상인거 같았다. 그날을 생각하면 웃음밖에 안 나오지만 그렇게 남편과의 첫 만남은 촌스러웠다. 문제는 다음날부터다. 남편은 나를 한눈에 점찍고 다른 남자는 내 옆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나는 그 때 문학청년과 순수한 데이트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자주 만날 수 없어서 한 달에 한번 만나면서 서로 그 사이 읽은 책 후기도 나누고 편지도 쓰면서 마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그 청년과 데이트를 하는 걸 알고 그 청년에게 나를 만나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그 청년은 이원을 떠나버렸다. 남편이 그 청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당연히 그 청년은 남편 눈에 가시였다. 지금의 여장부 같은 나를 보면 꽃다운 열아홉 살 남자들의 구애를 받던 큰 애기를 떠올리기 어렵지만 그 때는 명랑하고 사랑스러웠다. 그 청년은 이원을 떠나 강경으로 가 버린 이후로 연락이 뚝 끊겼다. 편지 한 통이 없었다. 어머니도 그 청년을 마음에 들어 하셔서 매정하게 연락을 끊었다고 원망하셨다. 우리는 그 속도 모르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청년이 강경에서 보낸 편지는 중간에서 남편의 후배들이 오는 족족 다 가로챘던 것이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보석처럼 빛나는 추억이 되어 발그레한 뺨의 열아홉 살로 돌아가 본다. 남편은 어머니에게 나를 달라고 떼를 썼지만 어머니는 집안 형편도 어렵고 기질이 센 남편이 마음에 안 들어서 5년 후에 데려가라며 달래셨다. 지탄으로 영화를 보러 가면 남편 후배들이 형님 애인이라고 대접도 잘해주곤 했다. 남편도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나에게 잘해주었다. 4남매 낳고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았다. 남편은 농사 안 짓고 벽돌 공장의 공장장을 했다. 남편의 불같은 성격 때문에 결혼을 반대했던 어머니도 돌아가시면서 “성자야 너 신랑 같은 양반을 몰라보고 내가 너무 괄시했다.”며 사위 사랑 못준 마음을 못 내 아쉬워 하셨다.
■ 2012년, 암 투병 끝에 떠난 남편, 그리운 ‘이상문’씨 병원에서도 손을 놓은 암환자의 몰골은 참담 했다. 대 소변을 가릴 수 없어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다. 보는 내내 애가 탔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남편은 손주들한테 당신 병색 완연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다고 애원해서 몰래 몰래 씻겨주고 기저귀도 대전에서 트럭으로 사와서 쟁여두고 썼다. 남편은 병세가 심해지면서 당신의 죽음을 예견했는지 나에게 같이 죽자는 말을 수시로 했다. 아마도 나를 두고 떠나는 마음이 못내 아쉽고 아팠던 모양이다. 남편에게 “여보 우리 세 번째 집지을 때까지 살아야지 힘 내” 위로하면서 남편의 마음을 다독였다. 남편과 나는 애들 출가시키고 서울 가서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일을 했다. 남편이 그 분야의 기술자였다. 10년 정도 열심히 일하면서 몇 억을 모아왔다. 그래서 집도 짓고 아이들 사업 자금도 보태주면서 고생한 보람을 찾기도 했다.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그리움만 남는 법이다. 낚시 좋아하던 남편과 둘이 붕어 향어 낚시하면서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시절이 떠올라 소매 끝으로 눈물 훔치면서 남편을 돌봤다. 남편 떠나던 날 겨우 한 숨이나 남았을 때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보 걱정 마. 애들 걱정 말고 먼저 가서 나 기다리우.” 귀에 속삭이며 남편을 가슴으로 안아주었다. 남편은 어린 아이 마냥 내 가슴에 묻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뼈 밖에 안남은 남편을 품에 안고 통곡을 하며 그 이를 떠나보냈다. 남편이 떠나던 날, 염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아버지 낚시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니 노자 돈 많이 넣어라 ” 했더니 속 모르는 아이들이 아버지가 가져가는 돈도 아닌데 알아서 하겠단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혼잣말로 나를 위로했다. ‘그래 너희들이 내 마음을 어찌 알겠냐.’ 그렇게 속절없이 남편을 떠나보내고 하염없이 울었지만 남은 사람은 또 살게 돼있다. 이제 간간이 추억으로 떠올리며 젊은 날을 회상 할 때나 생각나는 남편이다. 그래도 내 인생의 동지며 사랑인 ‘이상문’씨. 오늘은 더 많이 보고 싶구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남편을 떠나보냈다. 얼마나 지난 후의 일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보낼 것이다. 떠나고 나면 덧없는 인생이지만, 오늘 내가 만난 하루는 인생의 덤이다. 만추의 깊은 가을을 나도 넘어섰다. 하얀 눈 쌓인 포근한 겨울날을 보듬을 채비를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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