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신문

향기 그윽한 모란꽃처럼 살다. 이학순 어르신

한만정 기자 | 기사입력 2021/01/05 [05:14]

향기 그윽한 모란꽃처럼 살다. 이학순 어르신

한만정 기자 | 입력 : 2021/01/05 [05:14]
이학순 어르신

지난 봄날, 보랏빛 붓꽃은 다솜했고 모란은 화려하게 피어 만발했다. 마을 골목마다 햇살은 넘치게 퍼졌고 대문은 단정하게 닫혀 있었다.

대문을 밀치고 들어서서 인사를 드리니 모란 같은 웃음을 앞세운 어르신이 반겨주신다.

거실에 자리를 앉고부터 어르신의 이야기는 봇물처럼 쏟아진다. 때론 나직이 때론 폭풍처럼 불어 닥치는 어르신의 과거가 나비의 날개 짓처럼 위태로우면서도 쉼이 없었다.

“상주에서 육남매의 딸 맏이로 태어나, 오빠와 나, 동생 넷인 집안에서 다복하게 살았지. 그 시절 시골 살이 대부분이 누나가 혹은 언니가 동생들을 거둬 키웠어. 내 나이 18살에 22살 된 3대 독자 신랑을 만나 혼인을 했어. 친정과 신랑 집은 50리 거리였으니 가깝고도 먼 거리였지. 신랑은 목수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어. 혼인하여 시어머님을 모시고 신랑 직장따라 서울로 올라갔어. 신랑은 목공소에서 일을 했는데 그 시절에는 인기 있는 직업이었지. 처음에는 찬장과 탁자와 테이블 같은 것을 만들었고, 건설 경기가 호황을 누리면서 아파트와 병원, 학교를 짓는데까지 불려갔어. 신랑이 월급도 제법 받아주고, 자기가 일을 떼면 뭉치 돈도 갖다 주고 그 시절엔 재미나게 살았어.”

먼 옛날을 기억하시는 어르신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 또한 어르신이 살아오신 발걸음을 되짚어 보며 인생의 기억들은 어찌 저리 공평해서 좋은 날, 슬픈 날이 교대로 다가오는지 가늠한다.

딸 하나를 낳고는 이름을 선혜라 지었다. 그런데 둘째가 안 생겨서 시모님은 날마다 아들 타령을 했다. ‘동생 봐라, 이번엔 아들 봐라’ ‘니가 터를 왜 안 파느냐  얼른 동생 데리고 오너라.’ 날마다 날마다 둘째를 기다리는 시모님 등살에 생병이 났다.

나는 부끄러워 대낮의 밝은 해를 못 보았다. 방안에 꽁꽁 숨어 하루 세 끼 시모님 진지만 챙겨드리고 밖엔 나가질 못했다. 3대 독자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피가 말랐다.

내가 죄가 많아서 그렇다는 생각에 병이 나서 속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그래서 시누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대를 이을 마땅한 사람을 구해 달라고. 그랬더니 소박맞은 벙어리 아줌니가 있다 길래 내가 그 때 돈으로 10만원을 주고 그이한테 옷을 한 벌 해 입히고 데리고 왔다. 키도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사람이 눈망울이 착해 보였다. 이웃 사람들이 ‘선혜네에 이쁜 손님이 왔다.’ 면서 궁금해 하는데 내 속은 회오리바람처럼 요동쳤다.

첫날밤을 치러야 하는데 신랑이 ‘나는 못해. 니를 두고 나는 딴 사람 못 봐!’ 하는 거였다. 7월에 데려왔는데 신랑이 그 방에 안들어가길래 내가 같이 들어가 누웠다.

그래, 신랑이 코를 드르렁 골면 내가 살짝 일어나 그 방에서 나와 시어머님 방으로 돌아갔다.

몇 날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둘이 손도 잡고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 간에 정이 들어 넷이 잘 지내면서 아들 보기만 기다리는데 어느 날 그이가 피를 토했다. 시어머님이 놀라서 ‘저 몸에서 아들 못 본다. 더 이상 정들기 전에 내 보내라’ 하셨다. 그래서 소개해 준 시누이남편한테 친정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서 이별을 했다.

어느 한 시절, 우리네 삶에는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이뤄지고 만들어졌으니 그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모두 잊혀지고 말리라.

아들 보려는 마음에 이번엔 또 다른 여자를 물색했다. 하지만 억지로 되는 일이 어디있던가 신랑은 어머니께 “그만 포기하고 선혜 엄마랑 잘 살아보겠어요”

나는 고맙고 미안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어머님이 집안의 대를 꼭 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이번에는 배꼽도 안 떨어진 남의 아들을 양자로 데려왔다. 신앙생활 하면서 그 양아들을 잘 키웠다. 남편 김상규의 子로 출생 신고를 하고 선혜 동생이 되었다.

탈 없이 잘 자라서 전기 기술자가 되어 직장 생활을 잘 하더니 24살에 일찍 결혼을 했다. 직장 생활 하던 양아들이 이번엔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경험을 좀 더 쌓고 하라며 말리다가 결국은 사업장을 차려줬다. 점점 가게를 늘려가더니 종래는 IMF를 맞았다. 빚이 쌓여 모른 척 할 수 없어 도와주고 나니 허망했다.

이후 어디 필리핀으로 갔다 어쩐다 소문만 무성하고는 연락이 끊어졌다. 그 때가 2000년도인데 시어머님이 건강도 안 좋아지시고 서울에 오만정이 떨어지신다고 생활을 정리하고 이 곳으로 내려왔다.

2004년에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둘이 살고 있는데 2012년 영감님까지 날 혼자 내버려두고 떠났다. 그 해 가을에 심심풀이 삼아 도토리를 줍겠다고 오토바이를 타고 근처 산에 다녀오시다가 뺑소니차에 치이셨다.

영감님을 병원에 모셔다 드린 사람이 응급실까지만 실어드리고 가 버린 바람에 사고 경위와 내용을 아무도 모른다. 영감님은 뇌사 상태에 빠져 3번이나 수술을 했지만 1년 동안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셨다. 생각만 해도 원통하고 가슴이 아프다.

어르신이 말씀하시며 먼 산을 쳐다보시는데 내 가슴도 답답해져 왔다. 이럴 때 어떤 말씀이 위로가 될까?

큰 아픔을 곁에서 보며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두 손을 잡아 드리며 한숨도 보탤 뿐이다. 어르신의 손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 땅은 박씨 문중 땅인데, 일 년에 지대 사용료로 3만원 정도를 줘요. 영감님 돌아가시기 전부터 쌀도 저렴하게 사라고 증표도 주고 매월 돈도 얼마씩 보조금으로 줘서 연명했지. 지금도 혼자 사는 나에게 쌀도 주고 반찬이며 온갖 것들을 챙겨줘서 잘 살고 있어. 서울 사는 동생들도 나를 시시때때로 보살펴 주지. 내가 업어 키운 여동생들이 언니 불쌍하다고 오면 눈물 바람을 날리고 가. 나는 청산교회에 나가고 있어. 가끔은 혼잣말로 ‘예수님, 외로워요. 가족들 보고 싶고 혼자 사는 게 힘듭니다.’ 라고 어리광이라도 부리면 이렇게 말씀 하시는 듯해요. ‘아니다, 내가 널 지켜준다. 사는 날까지 잘 지내다가 좋은 나라로 오너라.’구요. 그러면 저는 또 기운내서 살아가는 게지요.

참 어질고 점잖은 어르신이다. 살아온 구비마다 설움과 아픔과 눈물로 점철되어 있어도, 또 그렇게 견디고 참아 오셨으니 지나간 시절을 이야기로 토해낼 수 있으리.

어르신께 인사드리고 돌아오는 길,

모란은 고개를 떨구고 어느 새 해거름 노을빛이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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