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한 봄꽃들이 허리를 숙여 꽃 터널을 만들기 시작했다. 긴 팔을 뻗어 춤사위까지 선보인다. 복사꽃처럼 발그레한 뺨으로 물들었던 청춘을 뒤로하고 이제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었다. 아득히 멀리 와 버린 내 인생의 봄날들, 안타깝지만 허망하지 않은 건 두꺼운 외피를 벗고 속살을 기꺼이 내 보일 수 있는 내공이 만들어졌다.-안 순진. 인생극장 ‘산 넘어 산’의 은막스타는 이제 ‘커튼콜’에서 자유로워졌다. 어르신이 주인공을 맡았던 인생극장의 제목은 ‘산 넘어 산’ 이었다고 고백하셨다. 물론 한 마디 곁들이셨다. “어디 나 뿐이겠어, 다들 인생극장 ‘산 넘어 산’의 주인공들이지” 세상이 내 것 인양 환희에 전율하던 때도, 속울음 삼키며 피눈물을 흘리던 날도 수없이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어르신. 서울내기인 어르신은 꿈 많은 학창시절 서울 후암동이야기, 치열했던 삶의 현장 대전, 시골집 툇마루의 나무 향이 배인 소읍에서의 나날들이 모여 추억이 한가득이라고 하시며 당신을 추억 부자라고 소개하셨다. 더불어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가슴에 간직하고 속내를 터놓는 사람들이 불러주는 이름, ‘안순진’으로도 기억되기를 바라셨다. 1악장 봄, 후암동 예쁜이한테 견줄 꽃은 없었다. 어제 꽃망울은 오늘 봉오리를 피어냈다. 온 세상이 봄빛으로 차올랐다. 앞산 뒷산에는 온갖 봄꽃들의 화사한 빛깔로 현기증이 난다. 진달래, 산수유, 복사꽃, 자목련, 산벚꽃, 산당화,,,,이름을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들이 봄의 향연에 초대해주었다. 겨울의 끝자락이 길어 꽁꽁 언 땅을 뚫고 때가 되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꽃피우는 저들의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내 삶은 찬란한 봄빛에서 얼마나 멀리 와 있을까 내게도 저렇게 화사하고 아름다운 봄날이 있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꾸미는 손길을 타지 않아도 그저 봄같이 화사했던 나의 학창시절 후암동 골목길에 쭉 늘어섰던 일본식 가옥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방귀 꽤나 뀌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후암동, 정부 기관의 관사들이 행렬로 늘어섰고 담장은 내 키를 넘고 또 넘어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던 집들이 즐비했다. 그들만큼은 아니어도 나도 의식주 걱정 없이 까르르 웃으면서 후암국민학교, 상명여중과 상명여고를 다녔다. 전쟁 후에 폭격을 맞아 어수선한 동네에 새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할 즈음이라 동네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과 2층 양옥집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전쟁의 상흔과 개발의 설렘을 한 번에 맛보는 현장에 섰던 우리들은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득하며 성장 통을 앓았다. 유년시절에는 어머니와 검찰청 수사과장이던 외삼촌 슬하에서 성장했다. 본시 아버님은 평안북도 출신인데 1.4 후퇴 때 가족들이 내려오다 아버지는 임진강 전투에서 할 수 없이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아버님은 쌀 한말 지고 내려오다가 끝내 남녘땅을 밟지 못하셨다. 우리 가족의 아픔은 거기서부터 비롯됐다.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결국 만날 수 없었다. 시대의 아픔으로 아버지 품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유년을 보내면서 인생은 양손에 땅콩이 쥐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힘 있는 외삼촌 슬하에서 성장하면서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상명여중시절 큰 오빠의 도미(渡美)로 이별의 쓴맛을 알게 되었다. 당시 26살인 오빠는 공무원신분으로 공보부 장관 비서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경복고등학교 출신중 수재로 인정받았다. 미국에 나가있던 친구들이 오빠를 미국으로 불러들였고 오빠도 워낙 대단한 분이라 미국이 오빠의 꿈을 펼칠 땅이라는 판단으로 도미(渡美)를 결정했다. 아버지 없이 성장한 나에게 큰 오빠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팔 한 짝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아팠지만 나도 오빠의 갈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빠는 아메리칸 드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큰 오빠의 부재는 사춘기의 나에게 텅 빈자리를 남겼지만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사랑받으면서 그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사춘기 때 예쁘지 않은 소녀들이 있을까 만은 통통한 볼 살에 보조개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나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보조개가 네 개씩 이나 들어가 한번 웃으면 다들 나를 주목해주었다. 등 하교 길 집 앞 골목길에서 허리춤에 책가방을 끼고 쭈뼛 거리며 나를 기다리던 남학생들도 흑백 필름의 한 컷으로 남았다. 상명여중 다닐 때는 생물 선생님이 ‘백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성이 백씨였고 볼 살이 통통하게 올라 귀엽다고 붙여주신 이름인데 친구들도 덩달아 ‘상명 백곰’이라고 나를 불러줬다. 사랑 많이 받던 학창시절을 뒤로하고 나에게도 인생의 풍파는 여지없이 다가왔다. 누구도 예외일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나도 장미 꽃길과 가시밭길을 번갈아 걷게 되었다. 2악장 여름, 스무 살 후암동에서 대전 삼성동 빨간 벽돌집으로 여고를 졸업하고 어머니가 편찮으시면서 외삼촌 계시는 대전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스무 살 어린 나에게 대전행은 잠시 귀향 살이 같은 마음이었다. 그나마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던 것은 삼성동 삼성국민학교 옆에 지어진 우리 집, 나는 서울에서 이사 온 빨간 벽돌집 딸이었다. 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집이라 나는 대전에 와서도 눈길을 끄는 아가씨였다. 엄마를 간호하면서 20대를 보내고 있을 때 이웃에서 중신이 들어왔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는 앞뒷집 사이로 이웃사촌이었다. 니 집 딸, 우리 집 아들 결혼시키자며 어른들의 혼담으로 남편을 만났다. 내 나이 스물여덟, 조금은 늦은 결혼을 하게 됐다. 남편은 대전의 명문 D 고등학교와 서울 H대 공대를 나온 실력자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결혼이 말처럼 달콤하지는 않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먹물이 든 사람들의 특징인 실리적이지 못한 성향에 집안의 단도리를 내가 맡으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여성이라는 이름들이 운명처럼 걷게 되는 고단한 여정들이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묵묵히 참고 견뎌내면서 내 길을 걸었다. <저작권자 ⓒ 안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논단 많이 본 기사
|